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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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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종은 조선의 제24대 왕으로,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15년으로, 할머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헌종은 사회 불안과 천주교 박해,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 등 격변하는 시대를 겪었으며, 1849년 2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했다. 헌종 사후에는 철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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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조선)
기본 정보
헌종 어진
국왕조선 제24대 국왕
재위 기간1834년 12월 13일 – 1849년 7월 25일
즉위즉위식
전임순조
후임철종
이환 (李烉)
묘호헌종 (憲宗)
존호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시호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장숙왕 (清國에 의한 시호)
출생일1827년 9월 8일
출생 장소창덕궁 경춘전, 한성
사망일1849년 7월 25일
사망 장소창덕궁 중희당, 한성
매장지경릉, 구리, 대한민국
종교성리학
개인 정보
본관전주 이씨
아버지문조 (효명세자)
어머니신정왕후
배우자효현왕후 (1837년 결혼, 1843년 사망)
효정왕후 (1844년 결혼, 1849년 헌종 사망)
자녀옹주 (요절)
문응 (文應)
원헌 (元軒)

2. 생애

헌종대왕실록》 (국보 제151호). 헌종의 14년 7개월간의 치세를 기록한 《헌종실록》은 다른 실록들에 비해 내용이 부실하고 분량도 적다.


헌종은 조선의 제24대 왕으로, 이름은 환(烉),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이다. 전주 이씨이며,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이다. 효명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7] 순조가 승하한 후 조선 국왕 중 가장 어린 나이인 8세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6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의 치세는 삼정의 문란이 심각했고, 신분 질서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안동 김씨풍양 조씨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으며, 잦은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또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어 척사윤음이 발표되고, 프랑스인 신부와 조선인 신부 김대건이 처형되는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서해안에는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여[8]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헌종은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헌종의 죽음으로 정조의 직계 자손은 단절되었다.

2. 1. 탄생과 즉위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익종)와 세자빈 조씨(신정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9]

1830년(순조 30년) 5월 6일, 아버지 효명세자가 승하하였으며 4개월 후인 9월 15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왕세손 책봉은 정조 이후 71년만이며, 헌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세손이기도 하다.[7]

1834년(헌종 즉위년) 11월 18일, 할아버지인 순조의 뒤를 이어 경희궁 숭정문에서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10] 할아버지와 손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영조정조에 이어 두 번째이다. 헌종의 나이가 어려 할머니인 대왕대비 김씨(순원왕후)가 6년 동안 수렴청정 하였다.

2. 2. 치세

헌종은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0년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1834년 순조가 훙서하자 8세(세는 나이)의 나이로 즉위했다.[7] 조선의 국왕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이로 인해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6년간 수렴청정하였다. 헌종이 나라를 다스린 시기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한 수해를 비롯한 자연 재해와 전염병으로 인해 생활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도는 유민이 급격히 증가했다.

헌종의 치세는 순원왕후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였으며, 대왕대비의 친정인 안동 김씨를 주축으로 정국이 운영되는 가운데,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가 세를 확장하면서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들은 비변사의 주요 요직을 독점하였다. 1837년(헌종 3년) 3월, 안동 김씨 가문의 효현왕후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15], 1843년(헌종 9년) 효현왕후가 승하하자 다음해인 1844년(헌종 10년) 10월, 남양 홍씨 가문의 효정왕후를 새로운 왕비로 책봉하였다.[16]

이처럼 사회 불안으로 인해 국왕 폐위를 꾀하는 모반 사건이 두 차례나 발생했다. 1836년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1844년 민진용이 다시 은언군의 손자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17][18][19][20] 두 차례의 모반 사건 모두 정치적 세력이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들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라도 왕권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국왕이 경시되었다.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호 (Samarang)가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건이 있었고, 1846년 프랑스 제독 세실이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국왕에게 국서를 받게 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1848년에는 외국 배가 경상도·전라도·황해도 등지에 빈번히 출몰하여 민중이 크게 동요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통상과 문호 개방 요구를 받았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중신들의 권력 투쟁에 몰두했다.

헌종 시대에는 대규모 가톨릭 탄압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 "천주교 박해" 참조)

9년간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풍양 조씨의 권력 다툼에 휘말린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조선에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준비하지 못한 채 1849년 6월, 23세(세는 나이)로 훙서했다.

에서 받은 시호는 "장숙왕"이다[6]。이 시호는 치세 중의 공식 기록에서 철저히 제거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 조선 국왕의 행적, 『능지문』과 같은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제거되었으며, 외교 문서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랑캐"로 여긴 청으로부터의 시호를 치욕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며, 겉으로는 청에 대해 조공·책봉사대를 행하여 공순한 자세를 취했지만, 청에 대한 반발심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6]

2. 2. 1. 천주교 박해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주자학 이외의 거짓 학문인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순원왕후척사윤음 발표로 천주교 탄압이 강화되면서 발생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사제들이 처형되었고, 정하상, 유진길 등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되고 처형되었다.[23] 순원왕후는 한글로 된 척사윤음을 내려 백성들에게 사학에 물들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했다.[24]

1846년(헌종 12년)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25] 김대건 신부는 기해박해 이후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었다.

2. 3. 최후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세는 나이)로 승하하였다.[26]

헌종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였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익종의 6촌인 덕완군(철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철종은 헌종보다 나이가 네 살 어렸으며, 7촌 재당숙부에 해당한다.

1849년 10월 28일,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 서쪽 구릉의 효현왕후 묘소 옆 경릉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colspan="2" |본관생몰년부모비고
문조 익황제
文祖 翼皇帝
익종대왕
翼宗大王
전주1809년 - 1830년순조 숙황제
純祖 肅皇帝
순원숙황후 김씨
純元肅皇后 金氏
조선의 추존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신정익황후 조씨
神貞翼皇后 趙氏
신정왕후
神貞王后
풍양1808년 - 1890년풍은부원군 조만영
豊恩府院君 趙萬永
덕안부부인 송씨
德安府夫人 宋氏
효유왕대비
孝裕王大妃
효유대왕대비
孝裕大王大妃
조선의 추존 왕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시호본관생몰년부모비고
정비
추존 황후
효현성황후 김씨
孝顯成皇后 金氏
효현왕후
孝顯王后
안동1828년 - 1843년영흥부원군 김조근
永興府院君 金祖根
한성부부인 이씨
韓城府夫人 李氏
계비
추존 황후
효정성황후 홍씨
孝定成皇后 洪氏
효정왕후
孝定王后
남양1831년 - 1904년익풍부원군 홍재룡
益豊府院君 洪在龍
연창부부인 안씨
延昌府夫人 安氏
명헌태후
明憲太后



작호본관생몰년부모비고
경빈 김씨
慶嬪 金氏
광산1832년 - 1907년김재청
金在淸
신씨
平山 申氏
정빈 윤씨
貞嬪 尹氏
해평1833년 - 미상윤치희
尹致羲
미상
숙의숙의 김씨
淑儀 金氏
김해미상 - 1895년김학성
金鶴聲
미상



colspan="2" |생몰년생모
1▨▨옹주
▨▨翁主
1848년 - 1848년숙의 김씨



헌종은 숙의 김씨에게서 옹주 1명을 얻었으나 요절하였고, 다른 후궁들에게서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헌종의 죽음으로 정조의 남계 자손은 단절되었다.

4. 평가

헌종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친정을 하였으나, 안동 김씨풍양 조씨 간의 세도정치에 휘말려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 헌종의 치세는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수해와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1836년 충청도의 남응중과 1844년 민진용이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모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들이 주도한 것으로, 당시 왕권이 얼마나 경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845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무단으로 측량하고 돌아갔으며, 1846년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군함을 이끌고 와 국서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48년에는 외국 배들이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을 불안하게 했다. 이처럼 조선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통상과 문호 개방 요구를 받았지만,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권력 투쟁에만 몰두했다.

헌종 시대에는 기해박해라 불리는 대규모 가톨릭 탄압이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와 유진길, 정하상 등의 신자들이 새남터에서 처형되었고, 1845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사제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였다.

결국 헌종은 세도정치의 폐해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23세(세는 나이)로 훙서하였다.

으로부터 받은 시호는 "장숙왕"이다.[6] 그러나 이 시호는 "오랑캐"로 여겨진 청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하여 치욕스럽게 여겨졌고, 공식 기록에서는 철저히 제거되었다.[6]

4. 1. 긍정적 평가

헌종은 어린 나이에도 국정을 운영하려고 노력했으며, 일부 서적 편찬 사업을 지원했다.[11]

4. 2. 부정적 평가

헌종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왕권을 강화하지 못했으며,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지 못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한 천주교 박해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8]

5. 기타

헌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며, 친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풍양 조씨의 세력 다툼에 휘말렸다. 이 시기 조선 사회는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수해와 전염병으로 민생이 어려워졌다.

이러한 사회 불안 속에서 1836년 남응중과 1844년 민진용 등이 국왕 폐위를 꾀하는 모반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는 당시 왕권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조선의 허가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량하고, 1846년 프랑스 제독 세실이 기해박해를 구실로 군함을 이끌고 와 국서를 요구하는 등 서구 열강의 압력이 시작되었다. 1848년에는 외국 배가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히 출몰하여 민중이 동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헌종 시대에는 기해박해라는 대규모 가톨릭 탄압이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와 일반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1845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5. 1. 대중문화

영화와 드라마에서 헌종의 생애가 다뤄지기도 했다. 게임 《빅토리아 3》에서 조선의 시작 왕으로 등장한다.[2]

헌종이 등장하는 작품
작품명개봉년도배역비고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2018년정해인
명당2018년이원근
물괴2018년정해인
탄생2022년남다름


5. 2. 묘호 및 시호

1849년(헌종 15년) 10월 28일,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 서쪽 구릉의 경릉에 안장되었다.[27] 묘호는 '''헌종'''(憲宗)으로, 《헌종실록》에 따르면 널리 듣고 다능함(博聞多能)을 의미한다.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이다.

대한제국 순종 때인 1908년(융희 2년) '''성황제'''(成皇帝)로 추존되었으며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이다.

에서 받은 시호는 "장숙왕"[6]이다. 이 시호는 치세 중 공식 기록에서 철저히 제거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 조선 국왕 행적, 『능지문』 등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제거되었고, 외교 문서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은 청에서 시호를 받은 사실만 기록하고 시호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오랑캐"로 여긴 청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며, 겉으로는 청에 대해 조공·책봉사대를 행하여 공순한 자세를 취했지만, 청에 대한 반발심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6]

6. 계도

1세2세3세4세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정조수빈 박씨
박준원원씨순조순원왕후
조엄김조순심씨
조진관효명세자조대비
조만영성씨헌종



장헌세자━┳의소세손



┣22대정조━23대순조━효명세자(익종)━24대'''헌종'''



은언군전계대원군━25대철종



은신군남연군(양자)━흥선대원군━26대고종



은전군

참조

[1] 문서 헌종 대왕 행장(行狀)
[2] 웹사이트 New life for the palace of sighs https://koreajoongan[...] 2024-01-13
[3] 웹사이트 New life for the palace of sighs https://koreajoongan[...] 2024-01-13
[4] 웹사이트 Donggureung Tombs, Gyeonggi, South Korea - 동구릉 (東九陵), 경기 구리시 http://www.orientala[...] 2013-09-02
[5] 뉴스 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https://www.chosun.c[...] 2007-09-11
[6] 뉴스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www.chosunonl[...] 2007-09-16
[7] 서적 순조실록 1830-09-15
[8] 서적 헌종실록 1848-12-29
[9] 서적 순조실록 1827-07-18
[10] 서적 헌종실록 1834-11-18
[11] 문서 순조와 익종의 개칭
[12] 서적 헌종실록 1836-10-11
[13] 서적 헌종실록 1835-01-05
[14] 서적 헌종실록 1835-07-19
[15] 서적 헌종실록 1837-03-18
[16] 서적 헌종실록 1844-10-18
[17] 백과사전 남응중 [南膺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8] 백과사전 남응중역모사건 [南膺中逆謀事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 서적 헌종실록 1836-12-23
[20] 서적 헌종실록 1844-08-21
[21] 서적 철종실록 1849-09-12
[22] 서적 헌종실록 1839-03-05
[23] 서적 헌종실록 1839-08-14
[24] 서적 헌종실록 1839-10-18
[25] 서적 헌종실록 1846-07-25
[26] 서적 헌종실록 1849-06-06
[27] 문서 헌종의 묘호 결정 184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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